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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인생을 멋으로만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가 왜 월급이 일정한 직업을 선택하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걸 자랑으로 여기며 살았는데 어느새 남들의 돈 자랑이 부러웠다. 힘들어 죽겠다는 직장인 친구의 한탄마저 부러웠다. 그들이 돈을 저금하는 동안 나는 경험을 모았는데 이자로 겁이 붙었다. 불안정한 현실이 무서웠다.


내가 도전이나 외치며 페루와 스페인을 오가는 동안 아빠는 짐을 나르며 서울과 부산을 오갔다. 아빠는 몇 푼 더 벌려고 짐을 무리하게 실었다가 차가 고속도로에서 전복되었는데도 내가 걱정할까 봐 연락하지 않았는데, 나는 돈이 부족할 때만 연락했다. 바로 옆 사람이 눈물 흘리는 건 신경도 안 쓰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웃기려 애쓰는 아들을 둔 아빠가 불쌍했다.
내가 세월을 낭비하는 동안 세월은 아빠에게 주름과 틀니를 선물했다. 임플란트는 해주지 못할 망정 적어도 짐은 되지 말아야 했다.


한국이었다면 클릭 한 번으로 하루 만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게 답답해서 속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달라지지 않는 환경에 기분 상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곳에 적응했다.
전기가 나가면 고치는 데 일주일은 걸릴 것이라 예상하고 도서관에 가서 노트북과 핸드폰을 충전했다. 수도가 망가지면 수리하는 데 세 달이 걸릴 것이라 생각하고 헬스장 샤워실을 이용했다. 그들이 만든 리듬에 들어가니 더 이상 답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한 달 만에 해결되면 기뻤다.
그 리듬에 1년을 살다 돌아온 한국은 급했다. 승객이 좌석에 앉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고, 버스가 채 정차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시킨 택배가 오늘 도착했고 가스 밸브가 고장 나기도 전에 검침을 했다. 모두 부지런하고 빨랐다. 이 리듬은 마치 내가 편하게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어라 일을 시키는 것 같았고 또 누군가 편하기 위해 내가 죽어라 일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게 잘사는 건가?
스페인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낮잠을 자는 전통이 있다. 강렬한 여름의 태양을 피하기 위해 시작했다지만 겨울에도 그렇게 휴식을 취한다. 어쨌건 낮잠을 자며 에너지를 충전한 사람들은 일을 마치고 저녁 시간을 즐겼다.


외국에 있을 때는 그렇게 그립고 좋게만 느껴졌던 한국이 정작 와보니 나쁘게만 느껴지는 건 어쩌면 도전에 대한 아쉬움이 불만으로 튀어나오는 건지도 모른다. 깨끗하게 실패를 인정하고 얼른 현실의 리듬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위로받기 위해 들고 나온 책은 나를 화나게 했다.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많이 경험하라고? 그렇게 했다고! 긍정적으로 살았고, 자신감 넘쳤고, 항상 웃었다고… 그런데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잖아. 작가들 다 틀렸어.’
내가 틀린 걸 수도 있었다. 남들 눈에 특별해 보이니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니까. 따지고 보면 서울대에 입학하고, 페루를 가고, <개콘>에 들어간 시기에는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니까 대학에 간 거고, 대한민국 남자이니까 군대에 간 거고, 대학 졸업생이니까 먹고살 궁리를 한 거다. 그때그때 나타나는 관문을 넘을 줄만 알았지, 통과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그렇게 살다 경험은 많지만 전문성은 없는, 질투는 많지만 자신은 없는 서른이 되어버렸다.


나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 중 유일하게 엄마가 반대했던 것이 대학교 자퇴였다. 졸업하기 힘든 형편도 아니고 학벌주의에 염증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자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토머스 에디슨,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모두 자퇴생. 서울대생보다 서울대 ‘자퇴생’이 더 멋있게 느껴졌다. 엄마가 “졸업은 해라, 이 썩을 놈아”라고만 안 했어도 그 타이틀을 얻었을 것이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졸업 사진도 찍고 졸업 여행도 갔다. 정작 졸업은 못 했다. 그놈의 개그맨 시험에 붙어서.덕분에 백수에서 서울대생으로 신분 세탁을 했다. 입학한 지 10년 만에 복학을 했다. 새내기와 딱 십 학번 차이가 났다. 그 무섭던 조교라는 존재조차 후배였다. 심지어 교생을 나갔는데 담당 선생님도 나보다 네 살이나 어렸다. 괜히 미안했다. 교수님은 출석을 부를 때 특징을 잘 살렸는데, “공칠 학번 김병선”이라고 꼭 불렀다.


나도 새내기 대학생 때 그랬다. 아저씨에 가까운 복학생을 보면 얼마나 나태하면 저 나이까지 학교를 다니나 싶었다. 그 오해는 나와 같이 복학한 공칠 학번 동기 세 명이 깨부쉈다. 휴학하고 3년 만에 행정고시 5급에 통과한 합격생, 알바로 시작한 과외가 잘되어 입시 학원을 차린 원장, 그리고 나와 같이 군 복무로 페루에 갔다가 눌러앉은 사업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가 ‘졸업장이나 따야지’라는 마음으로 복학한 것이다. 그래도 나태한 줄 알았던 아저씨 복학생들도 분명 치열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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