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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는 주변 사람들과 모두 인연을 끊었다. 릴리와도, 맨 처음 뉴욕에 와서 살던 아파트에서 만난 앤더슨 부부와도 연락을 끊었다. 펠리컨 프레스의 프랜시스 카터와 팀, 몽클레어 기숙학교에서 만난 동창 로이스 바브리카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지금은 주변에 누가 있나? 오스본 부인 집 2층에 사는 켈리 부부, 그리고 리처드가 전부였다. “지난달에 해고당하는 바람에 부끄러워서 이사 나왔어요.” 테레즈가 말을 멈추었다.

  “이사를 했어?”

  “어디로 이사 간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리처드에게만 얘기하고 조용히 사라졌죠. 그렇게 해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나 봐요. 너무 창피해서 어디에 사는지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캐롤이 미소를 지었다. “사라진다! 그거 좋네. 그럴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야. 자유로우니까. 그건 알지?”

  테레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했단 말인가요?”

  “아니, 사랑하긴 했지. 그것도 열렬히. 하지도 날 사랑했어. 그런데 그이는 일주일 만에 여자의 인생을 꽁꽁 묶어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을 사람이더라. 사랑해본 적 있어, 테레즈?”

  테레즈는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느닷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거짓과 죄책감에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니요.”

  “그래도 사랑하는 게 좋지.” 캐롤이 미소를 지었다.

  “남편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나요?”

  캐롤은 안절부절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테레즈가 불쑥 물어서 놀란 것 같았다. 그래도 캐롤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 어떻게 보면 그이는 마음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 그 사람은 여전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어.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가 나라고 했는데, 그건 사실인 것 같아. 사랑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이가 고작 몇 달 동안 반짝 나를 사랑하고 만 것 같진 않아. 다른 여자한테 눈길 한 번 준 적 없었으니까. 그건 확실해. 그랬다면 오히려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졌을 거야. 그럼 내가 이해하고 용서했을 테니.”




테레즈는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을 들여다보았다. 페이지마다 알아볼 수 없는 기호로 가득했다. 그래도 그걸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다. 기호가 의미하는 건 전부 다 사실로 증명된 것들이다. 기호는 말보다 더 강하고 정확했다. 테레즈는 대니가 머릿속에서 그네를 타듯 하나의 기호에서 다른 기호 사이를 오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마치 밧줄을 타듯 손을 바꿔가며 우주를 헤쳐 갔을 것이다.




테레즈가 여기에 있는 게 좋은지 씩 웃었다. “전에 당신이 물리학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거 기억납니까?”

  “네, 대충.”

  “그건 틀린 말인 것 같아요.” 그는 한 입 베어 물고 말했다. “우정을 예로 들어볼게요. 공통점이 전혀 없는데 서로 친구인 경우가 주변에 흔하잖아요. 그건 우정에도 저마다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특정 원자끼리는 결합하지만 어떤 원자는 서로 결합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것과 비슷하죠. 한쪽에 결여된 요소가 다른 쪽에 있는 거죠. 우정이란 것도 양쪽이 서로 완벽하게 감추거나, 때론 영영 숨기는 특정 욕구에 의한 결과물인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저도 그런 케이스 몇 명 알아요.” 리처드와 테레즈가 그랬다. 리처드는 사람들과 잘 지낸다. 테레즈와는 달리 그는 이 세상을 잘 헤쳐 나간다. 테레즈는 리처드처럼 자신감 있는 사람들에게 늘 끌렸다. “그럼 당신의 약점은 뭐예요? 대니?”

  “나요? 왜, 나하고 친구하려고요?”

  “네, 당신은 내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요? 그렇다면 내 단점을 죽 늘어놓아야겠군요.”

  테레즈는 그를 보며 웃었다. 스물다섯 살의 젊은 청년. 대니는 열네 살 때부터 인생의 향방을 설계하고 모든 에너지를 단 한곳에 퍼붓고 있다. 리처드와는 완전히 달랐다.




“끔찍한 분들은 아니야. 그냥 고분고분한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시댁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난 알아. 자기들이 채워 넣을 수 있는 허점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이미 꽉 차 있는 사람을 끔찍이 불편해 한 거였어. 우리 음악이나 들을까? 라디오 듣는 거 안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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