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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덴고는 짐작했다. 어쩌면 남의 눈길을 받는 일이 없도록 일부러 실력을 줄여 답안지를 써내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녀같은 입장에 처한 아이가 자신이 받을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이며 살아가기 위한 지혜인지도 모른다. 되도록 몸을 작게 움츠릴 것. 되도록 눈에 띄지 않을 것. 

 

그녀가 극히 평범한 환경의 소녀이고 마음 편히 이야기하는 게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덴고는 생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두 사람은 사이좋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열 살의 소년과 소녀가 사이좋은 친구가 되는 건 어떤 경우에라도 간단하지는 않다. 아니, 그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작업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따금 기회를 잡아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쯤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결국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처지의 소녀가 아니었고, 아무도 상대해주지않는 교실 안에서 고립된 채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4월이 찾아와 5학년이 되자 덴고와 소녀는 각각 다른 반으로 갈렸다. 두 사람은 이따금 학교 복도에서 마주치고 버스정류장에 함께 서 있기도 했다. 하지만 소녀는 변함없이 덴고의 존재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덴고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덴고가 곁에 있어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 눈동자는 변함없이 깊이와 광채를 잃은 그대로였다. 그 때 교실 안에서 일어났던 일는 대체 뭐였을까, 덴고는 생각했다. 때로 그것이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손은 아오마메의 남다른 악력을 아직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덴고에게 이 세계는 너무도 많은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을 때, 아오마메라는 이름의 소녀는 학교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딘가로 전학을 갔다고 했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다. 소녀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그런 건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존재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아주 조금이나마 마음이 흔들렸던 사람은 그 초등학교에서 아마도 덴고 한 사람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뒤 오랫동안 덴고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행동의 결여를 후회했다. 그 소녀에게 했어야 할 말들을 이제는 얼마든지 마음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것, 말해야 할 것들이 덴고 안에는 분명하게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녀를 어딘가로 불러내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적당한 기회를 만들고 그저 약간의 용기를 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덴고는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덴고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아오마메에게 손을 잡혔을 때 느낀 그런 격렬한 마음의 떨림을 그 뒤 다시는 경험하지 못했다. 대학시절에도,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연을 맺은 여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 소녀가 남긴 그런 선명한 낙인을 그의 마음속에 찍지 못했다. 덴고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그녀들에게서는 아무래도 찾아낼 수 없었다. 아름다운 여자도 있고 마음이 따스한 여자도 있었다. 그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선명한 색깔의 날개를 단 다양한 새들이 가지에 앉았다가 다시 어딘가로 날아가듯이, 여자들은 다가오고 그리고 떠나갔다.


그런 때 덴고는 생각했다, 내 마음은 그 여자아이에게서 떠나는 게 아무래도 불가능한 모양이다. 그리고 학교 복도에서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던 것을 새삼스레 후회했다. 만일 그때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더라면 내 인생은 지금과는 다른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때 아오마메를 떠올린 건 슈퍼마켓에서 풋콩을 샀기 때문이었다. 그는 풋콩을 고르면서 극히 자연스럽게 아오마메를 떠올렸다. 그리고 풋콩 한 꼬투리를 손에 들고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백일몽에 빠진 듯이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는지 덴고는 알지 못한다. "저기요"라는 여자 목소리에 그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는 큼직한 몸으로 풋콩 코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덴고는 생각을 멈추고 상대에게 사과하고 손에 들었던 풋콩을 바구니에 넣고 다른 상품과 함께 계산대로 가져갔다. 새우와 우유 두부와 양상추와 크래커와 함께. 그리고 이웃 주부들에 섞여 계산 순서를 기다렸다. 마침 붐비는 저녁 시간이었고 계산대 담당자가 신참인지 일이 서툴러서 줄이 길게 늘어섰지만 덴고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만일 이 계산대 앞의 행렬 속에 아오마메가 있다면, 그게 아오마메라는 걸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글쎄, 어떨까. 아무튼 그새 이십 년이나 못본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볼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할 터였다. 거리에서 마주쳐서 혹시 그녀가 아닐까 생각했다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것도 별로 자신이 없다. 망설이다가 아무 짓도 하지 못한 채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나중에 깊이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거기서 한마디 건네지 못했을까, 하고. 

 

덴고에게 부족한건 의욕과 적극성이야, 라고 고마쓰는 자주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뭔가 망설일 때는 꼭 '뭐 어때' 하고 생각하며 포기해버린다. 그게 그의 성격이었다.


그는 아오마메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았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네가 내 손을 잡아준 일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뒤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너를 좀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 그걸 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겁쟁이였다는 것이다. 그것을 나는 오래도록 후회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후회한다. 그리고 너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마스터베이션을 해온 건 물론 입 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 그건 솔직함과는 또다른 차원의 일이다.


최근 몇 달 동안 나는 눈에 띄는 변화를 이뤄낸 것 같다, 고 덴고는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른 직전에야 드디어...... 대단하군, 하고 덴고는 마시던 캔맥주를 손에 들고 자조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대단해. 이 페이스로 간다면 남들 비슷하게나마 성장하기까지 대체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할까.


하지만 아유미는 상대가 뭔가를 원하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기도 모르게 응해주고 마는 경향이 있었다. 그 대신 상대도 자신에게 뭔가 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내가 말하려는 것 중 하나는 지금도 자주 그 녀석이 생각난다는 거야." 다마루는 말했다. "꼭 한 번 보고 싶다거나, 그런 게 아냐. 별로 만나고 싶진 않아. 이제 새삼 만나봤자 할말도 없고. 다만 녀석이 한눈 한번 팔지 않고 나무토막 속에서 쥐를 '끄집어내는' 광격은 내 머릿속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건 내게는 소중한 풍경 중 하나야. 항상 내게 뭔가를 가르쳐줘. 혹은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것이 필요해. 말로는 잘 설명이 안 되지만, 의미를 가진 그런 풍경, 우리는 그 뭔가에 제대로 설명을 달기 위해 살아가는 그런 면이 있어. 난 그렇게 생각해."


약속한 상대가 후카에리인지도 모른다. 혹은 아오마메인지도 모른다. 우시카와는 그렇게 생각하고 새삼 각오를 다졌다. 뭐니뭐니 해도 강한 참을성이 내 자산이다. 눈꼽만큼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그것을 승패의 갈림길로 알고 붙들고 늘어진다. 비를 맞아도, 바람을 맞아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도, 몽둥이로 내리쳐도 그 손을 놓지 않는다. 한번 놓아버리면 다음에 언제 다시 그것을 잡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당면한 극심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 극심한 고통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멀리까지 간다고 했지." 다마루는 말한다. "얼마나 멀어질까."

"그건 숫자로는 잴 수 없는 거리에요."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 사이의 거리처럼."

아오마메는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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