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설] 불편한 편의점 - 김호연
시현은 개인의 꿈이 외교 문제로 무너지는 경험을 하자 비로소 자신이 사회의 일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촛불을 들거나 축구를 응원하려고 광장에 나가는 사람들과는 자신이 전혀 다른 부류라고 느꼈다. 그녀의 삶은 방 안 구석의 모니터 속에 있었다. 넷플릭스와 인터넷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접하고 인생을 즐길 수 있었고, 자신만의 온실인 편의점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때론 공무원이 되는 것보다 편의점 알바생의 삶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힘들게 공무원이 되어봤자 결국 좀 더 큰 편의점이 아닐까? 국민의 편의를 봐주는 공간에서 또 다른 제이에스들을 만나는 삶……. 그렇기에 지금 이 익숙한 공간은 시현에게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보금자리였다.
순간 시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쨌든 자신이 이 사내에게 진짜 도움을 준 거고, 자신은 그걸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육……튜브 그거…… 돈 된대요. TV에서 그랬어요.”
독고 씨가 눈을 반짝이며 시현에게 말했다. 평소 같으면 헛웃음을 지었겠지만 그녀는 이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동안 로그인하지 않은 자신의 유튜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기억해내기 위해 애썼다.
그저 독고 씨와 ‘짜몽’이 가난한 부자父子처럼 삼각형 모양 아침을 먹는 걸 바라보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도감과 용서, 낯선 흥분이 선숙 씨에게 생동감을 주고 있었다. 자신 역시 이 기묘한 소동극의 삼각형 한 변을 차지한 게 이상하게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삼각김밥을 까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을 두드리던 손이 아파질 즈음 그녀는 이마로 문을 부딪쳐댔다. 쿵. 쿵쿵. 쿵쿵. 이마가 얼얼해질 즈음 그것도 포기하고 돌아섰다. 눈물이 흘렀고 가슴이 뻐근했지만 함께 고통을 나눌 남편은 없었다. 그동안 아들 자랑을 실컷 해대며 산지라 친구들에게 한심한 꼴이 된 아들에 대해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아들이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 그녀를 시기하던 동창들의 뒷담화가 멀리서 메아리쳐 귀에 울리는 듯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그는 강박증 환자처럼 상품 하나하나 줄을 맞춰 진열하는 데 애를 썼다. 한심한 아들과 참으로 비교되는 행동이었다. 처음으로 아들이 노숙자에서 갓 벗어난 중년 아저씨보다 못하다고 느꼈고, 그러자 스스로가 더 비참해졌다.
“오셨어요?”
상품 진열에 열중하며 그가 툭 던졌다. 선숙은 순간 터진 울음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다급히 창고로 들어가 유니폼 조끼로 갈아입는데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저 노숙자나 다름없는 사내보다 우리 아들이 못하다니……. 아니다, 독고 씨는 이제 건실한 사회인이 아닌가? 이제는 더듬대던 말투도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그에 반해 방콕에 게임중독인 아들은 사회에서 이탈한 패배자이고 앞날이 컴컴한 인간이다. 지 아버지 아들 아니랄까 봐, 선숙이 죽기라도 하면 사람 구실도 못하고 빌빌대다 노숙자나 부랑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자꾸 뭉게뭉게 떠올라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독고 씨가 창고 문을 연 채 선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고통 속에서 기억을 잃고 겨우 세상에 눈을 뜨고 나서야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연민의 시선을 가질 수 있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는 법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소통할 사람을 찾기엔 이미 늦은 듯했다. 그러나 힘을 내야 했다. 지금 내 앞에서 눈물을 훔치는, 내가 빠졌던 구렁텅이에 발이 빠지려는 선숙 씨를 도와야 했다. 그 고통을 실감했고 그 슬픔에 잠겨봤기에 무어라도 해야 했다. 그때 짜몽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지난가을과 겨울을 보낸 ALWAYS편의점에서, 아니 그 전 몇 해를 보내야 했던 서울역의 날들에서, 나는 서서히 배우고 조금씩 익혔다. 가족을 배웅하는 가족들, 연인을 기다리는 연인들, 부모와 동행하던 자녀들, 친구와 어울려 떠나던 친구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 주저앉은 채 그들을 보며 혼잣말하며 서성였고 괴로워했으며, 간신히 무언가를 깨우친 것이다.
